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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4. 1世 2世 3世 4世 문헌록 〉3. 고려금자광록대부태사상주국문하시중평장사조공신도비명(高麗金紫光祿大夫太師上柱國門下侍中平章事趙公神道碑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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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고려태사옥천조공사단비(高麗太師玉川趙公祀壇碑)
高麗太師玉川趙公祀壇碑 古無祀壇之禮而先儒以義起之烏可謂一家之私也哉噫公之墓在淳昌郡南侍郎洞酉坐之原而公之世至于玆六百有餘載今蒼梧茫茫無所麗牲此後承之汲汲於焄蒿者也任實郡任實邑北渴馬山戌坐原爰壝爰壇寔高麗太師趙公與其配貞敬夫人靈光金氏裸獻之所也子朱子曰祖先之靈在於子孫之身上也身上指誠敬矣然則祖先之靈亶在乎子孫之誠敬誠敬極處神亦格思墓與壇何殊論哉謹按公諱璵其先玉川氏祖諱璋光祿大夫檢校大將軍即得貫皇祖也皇考諱洪珪奉翊大夫版圖判書公以忠肅王癸酉文科門下侍中同平章事戊寅陞金紫光祿大夫太師特進上柱國檢校時則胡元陸梁至于東土君昏相虐讒慝交搆忠定王辛卯拜公執義與李公齊賢羅公英傑諸賢兼掌國敎遞日講書程朱之學始興於世橫説竪説無非正彝倫嚴華夷供佛飯僧之俗鏤膚卉裳之陋漸變焉明使蔡斌被禍後李仁任池奫輩脅百官聯名爲書將呈北元有守先王決策終不署名者或杖或流公間以事入奏進言曰太祖草創大業南征北伐撫之以恩待之以禮其弘規遠畧深仁厚德固已培養千百年國脈也伏願殿下上念祖宗之庇庥下恤生民之塗炭惕然於中而思有以振之則此心之發卽天理之所存也願益加省察而親賢遠邪使吾胷中了然無纖芥之惑然後公行賞罰以快朝野之憤則民心悦而士氣充不事親元孰敢侮余哉以是涵養聖志不惟今日之功可以必成而千古因循之弊庶乎其可革也上嘉其言而允之于時圃隱鄭先生夢周潘陽朴先生尚衷上疏極論棄順從逆背強向弱之非計而辭意甚切諸明而竟不納公自此絶意世情浩然遯于故庄坎坷沒身嗚呼使公若生于昭代則致君於堯舜而澤民於皥皥如也其勳德之成就豈易量哉跡公平生其所與也其仕止也亦足以觀其所存之一端也公之孫吏判諱淵正順諱浣昆季後承今其數不億而散居嶺湖克紹厥武以與不侫曾有文字之講莫嫌乎人文俱非而走寒溪曰吾先祖太師公勳業也懿德也經術也宜有詔諸後而滄桑屢變兵燹間經可徵而可書者十不存一博采傳聞拾綴燼餘以資公蹟願惠一言之重盖其向先追遠之誠有感人之深而亦有可書者未敢終辭系之以一詞詞曰欲識人之賢不肖先觀人之所從遊明於大義移風俗問其師曰學程朱春露秋霜多感慕毖祀於斯乃陟降岐嶷令孫能繼武源深方知流斯長 檀紀四千三百十五年壬戌季夏節 全州 李亨求 撰 고려태사옥천조공사단비(高麗太師玉川趙公祀壇碑) 먼 옛날에는 단(壇)에 제사(祭祀)하는 예(禮)가 없었으나 옛 선비들로 하여금 의 (義)를 일으키게 하니 어찌 한 집안의 사사로운 일이겠는가. 슬프다. 공의 묘가 순창군 남시랑동 유좌(淳昌郡 南侍郎洞 酉坐)에 있더니 공의 세대(世代) 이미 六백여년이 되었다. 이제 창오사(蒼梧山)이 망망(茫茫)하여 제물을 이룰 곳이 없으니, 후손들이 아름다운 마음을 쏟아 임실읍 두곡리 유좌(任實邑 杜谷里 酉坐)에 담을 쌓고 이에 단(壇)을 모으니 고려태사조공(高麗太師趙公)과 그 부인 정경부인(貞敬夫人) 영광김씨(靈光金氏)의 제사를 받드는 곳이라 주자(朱子) 가로되, 조선(祖先)의 영(靈)이 자손의 몸에 있다 하시니 자손의 정성(精誠)과 공경(恭敬)이 지극한 곳에 신(神)도 또한 감응하시나니 묘와 단을 어찌 달리 의논(議論)하라. 삼가 살피건데 공의 휘(諱)는 여(璵)요 그 선세 (先世)는 옥천씨(玉川氏)라 조(祖)의 휘는 장(璋)이요. 벼슬은 광록대부검교대장군(光祿大夫檢校大將軍)이니 곧 관향(貫鄉)을 얻은 상조(上祖)시라, 고(考)의 휘는 홍규(洪珪)요 벼슬은 봉익대부판도판서(奉翊大夫版圖判書)이시니 공은 충정왕(忠定王) 신묘년(辛卯年 西紀一三五一年)에 문과에 오르시니, 문하시중 동 평장사(門下侍中同平章事)를 역임하시고 공민왕(恭愍王) 갑오년(甲午年 西紀一三五四年)에 금자광록대부태사(金紫光祿大夫太師)에 오르셨으며 이어서 상주국검교(上柱國檢校)에 특진(特進)하셨더라. 때에 원(元)나라 몽고가 강성하여 고려를 속국(屬國)으로 만드니 임금은 어둡고 재상(宰相)은 포학(暴虐)하여 참소(讒訴)와 사특(邪匿)함이 조정을 어지럽히는지라. 공이 경연(經筵)에 계시어 이공제현(李公齊賢)과 나공영걸(羅公英傑)등 여러 어진이들과 더불어 국교(國敎)를 장악하여 날마다 서적(書籍)을 강론(講論)하니 주자학(朱子學)이 비로소 세상에 일어나서 횡설수설(橫説竪説)함도 이륜(彝倫)을 밝히고 화이(華夷)를 엄격히 하였을 뿐 아니라 불(佛)을 공양(供養)하고 승니(僧尼)에게 시주하는 풍속(風俗)과 몸을 새겨 문신(文身)하며 풀을 엮어 치마를 대용(代用)하는 누습(陋習)등 차차 정사(正邪)가 가려지고 더러운 풍속은 고쳐지더라. (明)나라 사신 채빈(使臣蔡斌)이 피살후(被殺後)로 이인임 지윤(李仁任 池奫) 등이 백관(百官)을 위협(威脅)하여 두루마리를 만들어 북(北元)에 보낼새 선왕(先王)의 결책(決策)을 지키어 서명(署名)치 않 은 자는 혹 곤장(棍杖)도 맞고 혹 귀양 간 이도 많더라.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와 반양 박선생 상충(瀋陽朴先生尚衷)이 글을 올려 순(順) 을 버리고 역(逆)을 따르며 강(強)을 등지고 약(弱)을 따르는 그릇된 계교를 극력 논하니 사의(辭意)가 깊고 간결하며 밝으시더라. 공이 이로부터 세정(世情)에 뜻을 끊고 호연(浩然)히 고향에 돌아오시어 불우한 여생을 마치셨더라. 슬프다. 공이 만약 밝은 세대에 나셨더라면 그 임금을 요순(堯舜)에 이르게 하고 백성에게 크나큰 혜택(惠澤)이 돌아가게 하였을 것이요 그 공훈(功勳)을 헤아리기 어려웠으리라. 삼가 공의 평생(平生)을 상고하건데 그 더불어 사귄 바와 진퇴(進退) 또한, 만세(萬歲)의 귀감(龜鑑)이 되리로다. 공의 손자 이판(吏判) 휘(諱)에 연(淵) 정순(正 順) 휘에 완(浣) 형제의 후손은 그 수가 번성하여, 경향각지에 흩어져 살며 능히 그 世德을 계승하고, 일찍 나와 함께 文字의 강론이 있으므로 人微識淺함을 불고하고, 한계(寒溪)에 찾아와 가로되, 우리 선조 태사공의 훈업(勳業)이며 의덕(懿德)이며 경술(經術)은 마땅히 후세에 전할 바 있거늘 상전벽해(桑田碧海)가 거듭된 장구한 세월 속에 병화(兵禍) 또한, 많이 겪어 가히 증거할만한 것과 쓸 만한 것이 열에 하나도 남지 않아 전하여 듣는데서 추리고 또 타고 남은 잿더미 속에서 주워 모아 공의 세상에 남긴 자취를 자료(資料)하오니 원(願)컨대 귀중한 한 말씀을 써 달라 하였다. 대개 그 선조(先祖)를 흠모하고 기리는 정성(精誠)이 사람을 깊이 감동시키며, 또한 쓸 만한 것이 있어 감히 사양치 못하고 마침내 한 사(詞)를 써, 가로되, 사람의 현불초(賢不肖)를 알고자 하면 그 사람과 더불어 노는 바를 보리로 다. 대의(大義)에 밝으시니 풍속(風俗)도 옮겼도다. 그 스승을 물으니 정주학(程朱學)을 배웠노라 한다. 봄 이슬 가을 서리에 크게 느끼어 정성으로 제사(祭祀)하여 번창한 후손이 능히 선업(先業)을 이으리니, 근원(根源)이 깊은 뒤에 바야흐로, 흐름이 길다 함을 알겠도다. 단기四三一五年 임술 계하절 전주 한제 이형구 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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